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2년 (문단 편집) === [[파일:WBSC 일본 국기.png|width=30]]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일본]]전 ([[9월 14일]], [[잠실 야구장]]): 5:2 승 === ||<-2> [[파일:1982_야구월드컵_서울_로고.png]]||<-13>[[야구 월드컵|'''{{{+5 {{{#fff 1982 IBAF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서울}}}}}}'''[br]''{{{#fff 1982 IBAF Amateur World Series}}}'']][br]{{{#ffffff ━━━━━━━━━━━━━━━━━━━━━━━━━━━━}}}[br]'''{{{#ffffff 9.14(화) 18:30,}}} [[잠실 야구장|{{{#ffffff 잠실 야구장,}}}]]''' || ||<-15>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파일:WBSC 일본 국기.png|width=30]]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918049 일본}}}]]''' || 스즈키 || 0 || 2 || 0 || 0 || 0 || 0 || 0 || 0 || 0 || '''2''' || || || || ||[[파일:WBSC 대한민국 국기.png|width=30]]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09539d 대한민국}}}]]''' || [[선동열]] || 0 || 0 || 0 || 0 || 0 || 0 || 0 || 5 || X || '''5''' || || || || ||[youtube(f2TG5I0UunI)]|| [[한일전/야구|일본과의 대결]]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던 경기이자, [[8회의 기적]]의 시조격인 경기다. 특히 이날 경기는 역대 어느 한일전 보다도 특별했는데, 당시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2859|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가 터져 [[반일]]감정이 극도로 끌어올랐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82년 6월, 일본 [[문부과학성|문부성]]이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검정하는 과정에서, '침략'을 '진출'로 수정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알려지며 한국과 중국에서 거센 반일시위가 일어났던 것. 그래서 이날 경기에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은 선수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표팀 사정은 좋지 못했다. 직전 경기가 서스펜디드 게임으로까지 흘러갔기에 당일 오전에 5이닝 경기를 치른 상황. 선수단은 단 몇 시간만을 쉰 채로 경기를 준비해야 했고, 거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는 [[한일전/야구|한일전]]이었던 만큼,''' "지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선수들을 짓눌렀다고 한다. 최동원과 임호균은 호주전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해 쓸 수 없었으며, 김시진은 이미 이탈리아와의 1차전에서 코칭스태프의 신뢰를 상실한 상황. 그래서 어우홍 감독이 선택한 선발 카드는 고려대학교 투수 [[선동열]]이었다. 이미 대회기간 동안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최동원을 보러 온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선동열을 보고 간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기에, 일본전에서도 충분히 활약해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경기 초반, 일본이 한국 대표팀의 선발투수 [[선동열]]을 상대로 2점을 먼저 뽑아내는데 성공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고, [* 나중에 후술하길 정말로 엄청나게 긴장했다고 한다.][* 사실상 수비의 실책성 플레이가 연달아 나와 2실점 했다.] 한국 타선은 6회까지 [[박노준]]의 잘 친 타구가 호수비에 잡히는 등, [[BABIP|불운이 겹치며]] 일본의 선발투수 스즈키에게 [[노히트 노런]]을 당할 정도로 빈타에 허덕였다. 그나마 7회말에 [[한대화]]가 첫 안타를 때려내며 노히트 행진을 깨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한국의 타선은 무기력했다. 한국에게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6개.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가온 8회말, 기회가 찾아왔다. 선두타자로 나선 심재원은 중전안타를 치며 출루에 성공했고, 대타 [[김정수(1960)|김정수]]가 중견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때려내 심재원을 불러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조성옥]]이 보내기 번트를 성공시키며 2루주자 김정수가 3루에 안착. 일본은 선발투수 스즈키를 내리고 니시무라를 마운드에 올렸다. 이 때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1977년 실업야구 7관왕의 주인공' [[김재박]]. 그러나 김재박은 이번 대표팀에서 대회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여 질타를 받았기에 번트를 시도할 것으로 보였고, 일본 배터리도 이를 인식한 듯 일부러 피치아웃을 시도하는데.... ||[[파일:external/www.koreadaily.com/210602125.jpg]]|| 일본 배터리가 일부러 뺀 공을 향해, 김재박이 말도 안되는 점프로 방망이를 갖다대는데 성공, [[번트]] 타구를 만들어 냈다.[* 타격 규칙 위반으로 아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번트의 경우에는 발이 타석을 벗어나도 관례상 규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MLB 경기와 WBC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으나 누구도 항의하지 않는다. 김재박의 번트도 항의는 없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7085&cid=42873&categoryId=42873&expCategoryId=42873|아래의 Q271]] 참조.] 이 틈을 타 3루주자 김정수가 홈에 들어오며 동점이 되었고, [[김재박]]도 1루로 전력질주하여 살아나서 여전히 아웃카운트는 하나뿐이었다. 이 번트를 두고 [[한국야구사]]나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91500209208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9-15&officeId=00020&pageNo=8&printNo=18754&publishType=00020|경기 당시 인터뷰]] 등에서는 "[[어우홍]] 감독의 사인을 [[김재박]]이 오해 해서 생긴 일"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정작 [[김재박]] 본인은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25/2009032500390.html|사인은 없었고,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다고 밝혔다. [[X파일|진실은 저 너머에.]] 그렇게 1사 1루에 발 빠른 김재박이 나가있는 상황에서 대표팀의 중심타자 이해창이 중전 안타를 때려내는데 성공하며 1사 1·3루가 되었고, 이어 일본의 투수로 세키네가 올라왔다. [[장효조]]가 세키네를 상대로 때린 타구는 내야 땅볼이 되어 병살타 코스로 이어질 뻔했으나,[* 본인 말로는 당시 2사로 착각했었다는데... 사실 2사여도 홈에 던질 필요는 없다. 아마 경기장 분위기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던 모양.] 일본의 유격수가 홈송구를 선택하며 홈으로 쇄도하던 김재박만이 아웃, 2사 1·2루가 되었다. 역전의 기회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는 [[동국대학교 야구부|동국대]] 4학년 학생이던 [[한대화]]. 예선에서 홈런포를 가동하며 팀의 해결사로 불리던 그가 나왔다. 한대화는 일본의 4번째 투수인 세키네와 풀카운트 싸움을 펼쳤고, 6구 [[슬라이더]]가 제대로 휘지 않고 들어오자 지체없이 방망이를 돌렸다. '''그리고...''' >'''2대2 동점 역전의 기회입니다 한국팀. 쳤습니다! 좌츠윽! 홈런성! 홈런이냐! 홈런이냐! ([[허구연]]. 아~ 홈런이에요! 홈런이에요! 네 홈런입니다!!) 호오옴러언~!!! 홈러어언~!!! 쓰리런 홈러언~!! 한대화~!!!! 쓰리런 홈러언~!!''' >---- >당시 중계를 맡았던 [[MBC]] [[김용(아나운서)|김용]] 캐스터의 홈런 콜 > 끈질기게 다섯 개의 공을 지켜본 한대화는 심호흡을 하며 배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제6구. 일본의 세 번째 투수 세끼네가 한대화에게 던진 여섯 번째 공은 가운데,그리고 높은 쪽으로 몰린 실투였다. 그리고 그 안타까운 실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전력으로 휘두른 한대화의 배트 중심에 제대로 통타당해 까마득히 뻗어나가기 시작했고,잠실야구장 좌측 폴대의 3분의2지점을 때리고 떨어졌다. '''홈런.''' >---- > 마지막 국가대표-김은식 > "좌측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공. 폴대를 맞고 크게 튕겨나온 이 공은,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때리는, 그야말로 기적이라 할 만한, '''홈런이었다!'''" >---- >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인 다큐멘터리 - [[한대화]] 편 21시 34분, 안개 낀 잠실 야구장의 왼쪽 담장을 향해 날아가던 백구(白球)는 그대로 스탠드에 빨려들어가서 폴대를 직격하고 튕겨나왔다. 0:2로 8회 초까지 끌려가던 대표팀이 8회말, 단 한 번의 공격만에 5:2로 뒤집어내는 '''역전 쓰리런 홈런이었다!''' 그리고 9회초, 일본의 마지막 타자 나카야가 [[선동열]]의 낮은 공을 퍼올렸고 이 타구를 [[2루수]] [[박영태]]가 잡아내면서 게임 종료, [[야구 월드컵]]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아시아팀 우승의 업적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달성하였다. 참고로 이 경기는 20세기 한국 스포츠 100년사 명장면을 꼽는다면 [[홍수환]]의 4전 5기와 함께 톱 10 안에 꼭 들어가는 경기이며, 그러다보니 이후 지상파 및 케이블 스포츠 채널에서 여러 번 방송했다. 특히 한국에서 열린 대회이자 일본을 이기고 우승한 대회라는 점과, 1977년 대륙간컵에 이어 두번째 세계대회 우승이라는 점 때문에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 대회 우승을 무자비하게 휩쓸던 쿠바가 불참했기에 가능했던 우승이기도 했다.[* 쿠바가 불참한 것은 [[북한]]의 우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이게 어때서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엔 [[냉전]]시절이라... 물론 쿠바 본인들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이 있을 리가... 결국 홈팀의 이점을 이중으로 받은 셈. 바로 2년 전인 1980년 도쿄 대회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결승에 올라가 쿠바에게 져서 준우승했다. 이후 1994년, 1998년, 2005년 대회에서 한국과 쿠바는 결승에서 다시 만났으나 한 번도 이기질 못했다. 한국과 쿠바가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 시작한건 2008년부터로, 잠실에서 가진 2차례 평가전에서 1승 1패씩을 주고 받았고 [[김경문호/2008년|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2차례 만나 2승을, 그리고 [[2015 서울 슈퍼시리즈]]에서 1승 1패, [[김인식호/2017년/평가전|2017년 평가전]]때 2승을 기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